봉숭아 물들이기
여름만 되면 생각나는 어린 시절 추억이 있어요.
더위에도 불구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피어있는 봉숭아 꽃을 따다가 집으로 가져가면, 엄마가 백반을 곱게 갈아 봉숭아 꽃을 넣고 찧어서 손톱 위에 올려주곤 했어요. 비닐로 칭칭 감아 흰 실로 손가락을 꼬옥 잡아매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다음날 손톱과 손 끝이 빨갛게 물들어서 예쁜 손톱으로 변신을 하죠.
게다가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 들인 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에 아주아주 소중히 손톱에 봉숭아 물이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겨울까지 기다렸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봉숭아 물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있는다고 해도 이제와서 아련했던 첫사랑이 이루어질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살면서 어디선가 첫사랑을 한번쯤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드네요.
그래서 봉숭아 물들이기, 저도 해 보았어요. 화단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봉숭아 꽃잎을 몇 개 따서 봉지에 담아왔어요. 형형색색 피어난 봉숭아 꽃 색감이 너무도 곱더라구요. 봉숭아 물 들이는 것은 어언 10년도 더 된 일 같네요.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 버린 건지 세월이 야속하지만 봉숭아는 여전히 제 손톱을 빨갛게 물들여 줄 것을 알기에 부랴부랴 약국에서 백반도 사왔답니다.
어렸을 때 백반 가격이 5백원도 안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천오백 원이나 하네요.
백반 사러 약국 갔을 때 재밌었던 일이, 약사님 백반 주세요. 했더니 젊은 남자 약사님이 "백반은 없는데 명반은 있어요."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명반 주세요." 하고 사왔어요. 백반이 명반인데......?
두고두고 봉숭아 물을 들일만큼 꽃잎의 양도 많아요. 백반을 조금 덜어 작은 절구에 넣고, 고운 가루로 만들어 준 다음 따온 봉숭아 꽃잎을 넣고 짓이겨줬어요. 봉숭아의 초록색 이파리도 함께 넣어 찧으면 더 손톱 물이 잘 든다고 하여 잎도 몇 장 떼어 넣어줬어요.
곱게 빻은 꽃잎을 손톱 위에 조금씩 덜어 얹었더니 코 끝에 풀 냄새가 느껴졌어요. 정확히는 백반 냄새인지 봉숭아 냄새인지 모를 쌉싸래한 향기가 어릴 적 추억을 상기시켜 줬어요. 비닐 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잘라 손가락을 감싸주고 어렸을 때 기억처럼 하얀 실을 가지고 와서 칭칭 묶고 있는 모습을 본 엄마는,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실로 묶고 있냐며 테이프로 가져와서 붙이면 더 쉬울 텐데 하며 혀를 끌끌 차셨어요. 어릴 때 추억에 젖어서 하던 대로 고대로 해야 되는 줄 알고 했는데 그런 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부랴부랴 테이프를 찾아서 비닐을 꽁꽁 싸줬답니다.
그리고 어릴 적 내 작은 손을 예쁘게 물들여주었던 고운 우리 엄마 손에도 봉숭아 꽃잎을 얹어 주었어요. 엄마가 해줬던 것처럼, 이젠 딸이 다 커서 엄마 손을 물들여주니 마음이 조금 이상했어요.
꽁꽁 싸맨 손가락 때문에 잠에 들기가 살짝 불편했지만, 피곤에 못 이겨 잠들고 난 다음날 아침 비닐을 벗겨보니 손가락은 불어서 쪼글쪼글 해졌지만, 생각보다 너무 예쁘게 물이 잘 들었더라구요. 손톱 주변 살갗에도 물이 들어 조금 지저분해 보였지만 2~3일 지나면 제법 지워진다고 해서 결과물에 엄청 만족스러웠어요.
일하다 말고도 자꾸 손톱을 보게 되네요. 약해 빠진 손톱이라 기르지도 못하고, 젤네일도 마음껏 못하지만 이렇게 봉숭아 물을 들여놓고 보니 자꾸 웃음이 나는 게, 철없이 놀이터를 뛰어다니던 철부지 어린시절 생각도 나고, 발톱에도 마저 물을 들이고 싶은 욕심도 나네요.
네고왕 할인을 한다기에 오호라 젤네일을 처음으로 주문 했었는데, 배송지연으로 한동안 감감 무소식이더니 봉숭아 물 들이니까 배송도착 문자가 오는 건 무슨 일일까요?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인가 봐요. 조금은 촌스럽지만 계속 보다 보면 너무 예쁜, 봉숭아로 곱게 물든 손톱을 즐기느라 오호라 젤네일은 다음으로 미뤄둬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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